창조인의 세상

그들의 세상 본문

심심해서 쓰는 글

그들의 세상

곰탱신 2020. 6. 16. 23:44

나는 생각했다. 이 세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 애초에 이 세상은 실재하는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나는 어떤 상태이지? 두려움? 불안감?
이 세상에서 난 나 그대로 존재하는가. 온전히 나 자신이라 믿을 수 있는가.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은 의미가 있었는가.
헛된 꿈이지 않았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그저 이렇게 무수한 생각들을 쏟아내는 것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가.
난 왜 존재하는가. 우린 왜 존재하는가. 여기엔 아무 이유도 없다. 아무 이유도 필요 없다. 단순히 뇌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인 신호들일지라도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이
모순이라 하더라도 난 그저 이곳에 서서 절망하는 수 밖에 없다. 머리는 떠나라. 움직이라 하지만 몸은 따라 주지 않는다. 나의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에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간신히 운 좋게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그 앞은 행복이 보장되어 있는가. 이 앞은 오로지 옳은 일만 일어날 것이라 누가 감히 장담하겠는가.
어쩌면 이 세상보다 더 잔혹하고 끔찍하고 소름돋는 씁쓸한 비극일 수도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나갈 이유는 없다. 그렇다. 두렵다. 막연한 미래가 너무나 두렵다. 마주하고 싶지 않다.
아무 생각없이 살고 싶다. 괴로운 일과 슬픈 일은 모두 잊고 여기서 다시 평범하게. 늘 하던 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은 최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순 덩어리다. 지금 그 말을 실감한다.
마음 한 켠에는 그냥 잊고 살자는 생각과 다른 한 켠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말하고 있다. 이제 와서 내 상식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미래에 후회한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드디어 난 이 기괴한 세상과 작별한다. 웃기다. 지금까지 두렵다고 생각했으면서 이제는 새로운 지식을 달라고 소리치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진정시켜야 한다. 어리석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생각은 충분히 했다. 이제. 실행할 시간이다.

아. 아아. 하하하하하하하하. 거봐. 이럴 줄 알았어. 여긴 그곳보다 더 끔찍하고 사랑스러워. 내가 점점 미쳐가는 것을 느낀다. 사랑스럽다니.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결국에 난 어리석은 선택을 했고 그 대가로 정신이 붕괴되고 있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 모든 것을 잊고 죽고 싶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인간으로서. 지성을 가진 생물로서.
그녀에게 기록을 남긴다. 이걸 읽지 말아줬으면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당신이 나와 같이 잘못된 선택으로 이곳에 왔다면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부디 당신 자신을 잊지마. 이성을 유지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가져. 나처럼 되기 싫다면 눈을 감고 부딪칠 때까지 나아가. 그 후에는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나를 믿고 제발 그리 해줘... 아... 이제 슬슬 한계인 것 같다. 온갖 생각이 뒤엉켜 내 자아를 파괴시키어리만ㄹ;렂더랴ㅣ랸ㅇㅌㄱㄱㅇㅎㄴ

기록은 여기서 끝나있다.


그는 여기서 죽었어.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닌 인간으로서 말이야. 그는 이제 없어. 우리를 이끌던 그는 이제 없어.
난 지금까지 그를 믿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여기까지 이끌어준 그의 마지막 부탁은 내가. 내가 이행할 거야.
난 눈을 감았다. 머리의 울림과 가슴의 먹먹함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들게 한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릴 것 같다. 하지만 안된다. 그럴 수는 없다.
그의 말을 들어야한다. 첫 발을 내디뎠다. 암흑 속에서 발을 내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두렵고 무섭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아간다.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지면 좀 더 큰 걸음을 내딛는다. 이제는 아무런 불안이 없다. 도박하는 셈 치고 보폭을 크게 늘려 달렸다. 그 과정에서 작은 장애물과 부딪힌 것 같지만 상관없다. 아픔은 있지만 참을 만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애물과의 만남도 익숙해질 쯤 난 끝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눈을 떴다. 
세상에.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일그러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처음부터 난 그들의 손에 죽었고 긴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저 강의 아름다움은 꿈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강에 이끌렸다.
가려하지 않아도 강은 내가 와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날 잡아당긴다. 난 순순히 강에 몸을 맡겼다. 지금까지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진다. 강의 흐름에 따라가다 보니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로 보이는 장소가 보였다.
눈을 감고 있어 잘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곳이었다. 나와 부딪힌 장애물들은 한 없이 초라해 보였고, 긴 시간 동안 달렸다고 생각한 길은 아주 짧아 보였다.
새삼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게 자랑스러웠다. 만일 그를... 아니, 이제 내가 알던 그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를 다시 한번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다.
당신 덕분이야. 당신이 남긴 기록 덕분에 여기까지 무사히 왔어. 당신의 희생덕분에 내가 살았어. 내가 존재하고 있어. 나만 살아있어서 미안해. 미안해요. 아아. 눈물이 흐른다. 결국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보고 싶다.
그와 이야기 하고 싶어. 함께 웃고 싶어.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이미 죽어버린 건가요.


라라라라라라라. 오늘도 상쾌한 공기군. 피범벅의 시체에, 마구잡이로 날아다니는 칼까지. 아주 완벽해. 이렇게 완벽한 세상은 여기 말고 없을 거야. 물론 있다면 내가 부셔버리겠지만.
오늘은 무슨 일을 하며 보낼까. 순진무구한 아이 납치? 함정을 만들까? 인형놀이는 이제 질렸어. 아. 어디 재밌는 일 없나? 뭣 모르고 달려드는 괴물 같은 거 말이야. 하하핳핳. 
그런 일은 없겠지. 있다면 다들 달려가서 신나게 팼을테니... 음. 할 짓도 없고 그 자식이 닦달하는 기억 찾기나 해 볼까.
솔직히 1도 흥미없지만. 지금 이 상태가 아주 좋은데. 왜 굳이 과거를 들여다봐야 되냐고. 그냥 잊고 살면 어디 덧나나. 썩어빠진 과거보단 창창한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옳은 일이란 말이지. 하아... 그래. 기억. 찾아보자.
썩은 악취가 나는 골목을 지나 무너져 내리는 고급진 인테리어의 가게에 들어섰다. 매콤한 향기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아주 매력적인 가게다. 주인장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대충 접수를 하고 아무 의자에 걸터 앉아....있기 전에 바로 주인장이 내려왔다. 손님이 쥐똥만큼도 없구만. 
"어이, 얼굴 잊어버리겠군. 왜 이리 늦어?"
"아아... 정말 귀찮다고. 애당초 기억이 필요없다는 데, 왜 그 자식은..."
"널 처음 발견한 게 그 녀석이잖어. 신경이 쓰이겠지."
답지 않게 신경은... 도대체 얼마나 돈을 처먹은 거야. 매달 뇌물 받고 아부해주는 거 아냐? 아아아. 벌써 지루해.
"자, 얼른 들어와."
주인장이 커튼을 젖히고 문을 열었다. 축축한 공기에 비릿한 냄새, 머리가 아플 정도로 멋진 분위기다. 정말. 감각 하나는 마음에 든단 말이지. 어떻게 이런 인테리어가 가능한 거냐고.
"뭐해, 얼른 앉아."
빨간 시트의 손님용 의자에 앉고 늘 하던대로 눈을 감고 셋을 센다. 하나. 둘.

치지 치직.... 치... 젠장... 더 이상은 못 참아.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무전이 되지 않는다. 바깥으로 파견을 보낸 녀석은 이미 죽었거나, 우릴 배신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쩌지. 남은 인원을 감당하기엔 식량이 부족해. 나라도 나가서... 아니. 침착하자.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면 언제나처럼 답을 찾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의지할 거라곤 여기에 남은 사람들뿐.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또 표정에 다 들어났나. 정말... 도움이 안 돼는군.
"괜찮아요?"
괜찮냐고? 아니. 이곳에서 괜찮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그래도 형식상 물어본 그 말이 짜증 날 정도로 안정이 된다.
"네. 잠시 회의를 해야 겠어요."
"앞으로의 일 말이죠..."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는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곳에는 어린아이,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원래는 건장한 청년들이나 어른들이 많았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 그나마 전략을 세우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회의는 그녀와 나. 둘이 진행하고 있다. 솔직히 모든 사람들을 살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진작에 버렸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들과 함께 있는가. 
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획을 세우고 울고 웃으며 지내고 있는가. 나 자신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내 마음에 조금의 양심이라도 남아있는 것일까. 아님, 인간으로서의 도덕을 지키고 있는 건가.
"현?"
"아, 네. 미안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괜찮아요. 저어... 지금 상황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제 제 차례 같아요."
설마 자기가 나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 
"제가 밖에 나가서..."
"아뇨."
그럴수는 없다. 그녀가 간다면... 난... 홀로 고립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생존을 소망하는 사람들. 그것 외에는 무기력하게 있을 뿐.
"제가 갈게요."
아.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밖을 나가겠다고? 그것도 홀로? 단단히 미쳤구나 이 현. 계속 이 짓거리를 해왔으니 피곤해서 그럴 수 있다. 그래. 난...
"제가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아. 제발. 멈춰. 뭐하는 거야? 다 살려고 하는 짓인데. 내가 나간다고? 
"안돼요. 현은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이 없어지면..."
"당신이 있잖아요. 당신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존재예요.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라고요. 당신이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붕괴될 거예요."
이기적이다. 정말 이기적이야. 나 편하자고 그녀에게 떠넘기다니. 사실은 혼자 남겨지는게 싫은 거잖아. 이 혼돈의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게 괴로울 뿐이잖아. 그래. 결국엔 모두 파멸할 것이다.
잘 알고 있어. 아마 그녀도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홀로 삼키고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있어. 
미안해요. 난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의미가 있는지. 고통받으면서 이 곳에 있어야하는지. 정말... 이제는 지쳤어요.

"일어나라."
"............................."
또 셋까지 못 셌다. 쳇.
"어때, 뭔가 기억나?"
"몰라. 평소대로 괴상한 꿈밖에 안 꿨어. 정말 효과있는 거 맞아?"
건물도 다 쓰러져 가고... 여기 완전....
"지금 쓸데없는 생각하고 있지? 그런거아니다."
".... 그럼 뭔데? 손님은 나 밖에 없고 기억 찾기는 개뿔, 꿈만 꾸는데. 퍽이나 아니겠네."
"....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뭘까... 주인장이 한심하게 보는것 같은데. 아니 도대체 왜?
"여기는 에렌의 소유다, 이 녀석아. 아직도 모르고 있었냐?"
..... 하? 지금 무슨 소리를...
"손님이 없는 게 당연하지. 여기는 에렌의 허락을 받아야만 올 수 있어. 다른 녀석들은 이 가게의 존재 자체도 모른다고."
"말도 안 돼."
"말이 된다. 게다가 기억을 찾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이거다."
에렌 그 자식의 가게라고? 여기가? 다 무너져 가는 곳이? 아니... 잠깐. 생각을 정리해보자. 그러니까... 불법인 가게에 날 들여보냈단말이지?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기억을 찾으라고...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
"에렌 그 자식은 왜 나한테 기억을 찾으라고 한대?"
"낸들 아냐?"
정말 가면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야. 머리통을 열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싶다...아아아악 성가셔!
"일단 갈게."
"그래라. 에렌에게 안부 전해주고, 다음에는 좀 자주 와!"
"마음 내키면."
가게를 나와 한적한 광장으로 향했다. 일단 머리를 식혀야겠어. 아. 스트레스받았더니 머리 아프네. 이게 다 에렌놈 때문이야. 재수 없는 자식. 이럴 때 어디 장난감 같은 게...... 오. 깨끗한 새 장난감을 발견하다니. 운이 좋네.
어리석게 무방비 상태로 거리를 활보하다니. 멍청이가 따로 없네. 죽고 싶어 환장했나? 뭐. 아무래도 좋지만. 오늘은 어떻게 놀아볼까나. 먼저...
손톱으로 피 좀 볼까나! 
말과 동시에 손톱이 장난감의 몸을 찢....어야 하는데.... 왜 멀쩡하게 날 쳐다보고 있는 거지? 장난감은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더니 서서히 표정 변화가 일어났다.
"아아... 아..."
뭐야, 공포에 몸이라도 굳은 건가. 거참 반응 한번 느리구만. 이런 띨띨이를 상대로 노는 건 재미없는데. 아아, 기분만 잡치고 오늘 운 더럽게 없네. 그냥 돌아가련다.
"현!"
옷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장난감이 도망을 치기는 커녕 오히려 날 붙잡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절박한 표정으로. 근데 현은 또 누구야?
"어이, 손 놔."
"네?"
쯧. 한 번 말하면 못 알아먹냐? 답답하게 굴지말고 얼른 꺼져. 난 돌아가서 잠이나 잘 거니까. 장난감의 손을 내리치고 옷을 털었다. 더럽게.
"... 현... 정말.."
맛이 간 장난감을 뒤로하고 흐느적흐느적 걸어 저택에 도착했다. 망할 놈의 에렌 얼굴을 다시 봐야 한다니. 최악. 솔직히 그 놈덕에 이렇게 살아있는 거지만... 그렇지만.
너무. 짜증나! 재수 없는 자식.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항상 실실 웃기만 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니까.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도 못 봤고... 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원...
일단 3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익숙한 형태로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를 치우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에렌이 준 노트에 꿈 내용을 적어야 되는데. 너무 귀찮다. 기억에 진전도 없고.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냐고.
하아 아아.... 일단 적자. 책상 위의 노트에 손을 뻗었다. 거리가 부족했는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 제기랄. 결국 일어서서 주웠다. 음... 꿈 내용이 어떻게 되더라. 내가 어떤 여자와 대화했고. 상황은 궁지에 몰린 느낌에... 몰라. 대충 써도 모르겠지. 빨리 끝내고 한 숨 자는 게...
"포이드. 꿈 일기는 썼어?"
아. 깜짝아. 기척도 없이 온다니까. 이제 좀 자려고 했더니만...
"그래그래. 썼어. 이제 나가."
"보여줘."
후우... 끈질긴 녀석. 당사자인 나도 아무 신경 안 쓰는데. 이 자식은 왜 이리 궁금해하는 거야? 성가신 자식. 
"자. 이거 갖고 나가. 잘거니까."
"......"
에렌은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말 더럽게 안 듣네. 이 집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순순히 알아듣던데. 주인이라는 놈은 왜 이래?
"뭔가... 좀 더 구체적이게 됐네."
"뭐? 엄청 대충 썼는데."
"... 정확하게 쓰라고 했을텐데, 포이드."
"상관없잖아. 어차피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아."
"왜."
"그 가게 네꺼였냐?"
"설마, 모르고 있었나?"
"대체 그런 가게는 왜 갖고 있는 거냐? 게다가 불법이라니. 너도 참 특이하다니깐."
"... 뭐, 재밌으니까."
재미? 더 이상 이해하는 걸 포기해야겠군. 전부 무시하는 게 내 정신건강에 좋겠어. 항상 이 녀석과 대화하면 이런다니까. 진행이 안 돼. 머리만 복잡해진다.
에렌은 왜 날 여기로 데려와서 거처를 제공해준걸까. 심지어 돈도. 옷과 음식. 모든 것을 빠짐없이 제공해준다. 아무리 친척 사이고 내가 기억을 잃은 것을 안타까워한다지만, 보통 이 정도까지 호의를 베푸나? 에렌은 비정상적으로 내게 잘해준다. 처음 반말을 했을 때도, 무례하게 행동할 때도, 항상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해도 그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징그러울 정도로 따스한 눈빛을 보내온다. 마치 내가 소중한 보물 이기라도 한 듯. 아 이런. 그 꿈 때문인지 쓸데없는 생각이 늘었다.
"더 이상 볼일은 없지? 얼른 나가."
난 이 녀석에게 무슨 득이 되지?
"...그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바로 알려."
아. 저거. 저거라고. 빌어먹을 저 미소는 매번 봐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덕분에 잠도 달아났고... 아. 수면제가 어디 있었...
"수면제는 먹지마."
"아... 언제 온거야. 그리고 그건 내 맘이거든?"
신출귀몰한 녀석. 제발 발소리 좀 내라. 
"수면제 먹으면 몸에 안 좋아. "
"안 좋아지던 네 알바 아니고. 당장 나가."
"그렇게는 안 돼."
갑자기 에렌이 내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 아.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나 없는 새에 낮술이라도 했나...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다른 방법으로는 재워줄 수 있어."
"됐어. 기절시키든가, 죽이던가 둘 중 하나겠지."
"흐음. 아닌데?"
거짓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해도 속은 날 갖고 놀 생각인거 모를 줄 아냐.
"수면제 안 먹을테니까. 나가서 다신 들어오지 마."
"아아. 서운하네."
난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리고 그대로 누웠다. 한 번 걸리면 성가시게 군다니까.
".... 알았어. 좋은 꿈 꿔."
에렌은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방을 나갔다. 이제야 한 숨 돌리겠네. 빨리 이 저택을 나가던가 해야지. 죽더라도 저 녀석 손아귀에서 벗어나겠어. 일단은 힘을 더 모아야지.


아아. 너무 순진하네. 아직 공부가 필요한가. 다른 녀석에게 걸리면 위험하겠어. 언제 날 잡아서 교육을 시켜야지.
그건 그렇고 뭔가 이질감이 느껴지는데.
"에렌님."
"아. 알아봤나요?"
"예. 에렌님이 느끼신 대로 외부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하이든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하이든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해온 유능한 집사이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이인데. 그런 그를 당황시킨 존재가 있다고?
"자아가 부서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뭐? 
"믿기 힘드시겠지만 확실한 정보입니다. 최근 '현'이란 자를 찾는 여자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그 여자는 아무런 표식도 없으며 비상식적으로 행동한다고 합니다."
현. 왠지 모르게 불안해지는군. 그 여자를 잡아야 한다고 내 감각이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분명 나에게 성가신 존재가 될 거야. 지금 진행 중인 실험에 영향을 줄 수도 있겠어.
변수는. 없애야지.
"포획해서 내 앞으로 데려오세요."
"예."
하이든은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이제야 실험의 중간에 도달했는데. 여기서 망칠 순 없지.
....... 내일은 포이드에게 고소한 손가락 구이를 줘야겠어. 분명 이딴 건 안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겠지만 너무 말랐어. 좀 더 먹여야지. 오늘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투덜대면서 내 말은 들었으니까. 후후후. 아 재밌어. 내일은 또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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